==== Profile ==== 랭보(Arthur Rimbaud, 1854~1891) 랭보는 말라르메와 베를렌느와 더불어 프랑스 상징주의의 대표적인 시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다른 상징주의 시인들보다도 보들레르의 뒤를 이어 현대 프랑스 시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시인이다. 현대시의 직접적인 계보는 보들레르로부터 시작하여 랭보로 이어지며, 아폴리네르를 거쳐 다다이즘(예술상의 허무주의)과 초현실주의에 이르게 된다. ==== Who is Rimbaud ==== (1) 반항적인 시인 랭보는 육군 대위인 아버지와 엄격한 부르주아 출신인 어머니 사이에 샤를르빌르에서 태어났다. 그가 출생하고 얼마 안되어 아버지는 원정을 떠났으며 신앙심 싶은 어머니 슬하에서 엄격하게 자랐다. 결국 그의 부모임은 헤어지고 어머니 혼자 랭보를 돌보았다. 그는 엄격한 어머니의 속박에 반항하면서 자기의 꿈을 가꾸었다. 19세기 시인들 중에서 랭보처럼 반항적인 정신을 보인 시인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그의 마음속에는 자유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이 솟구쳤고 새로운 것을 찾으려는 욕구가 사무쳤다. 그러므로 그는 어떠한 형태의 속박이나 구속을 타파하고, 새로운 것과 미지의 것을 찾으려는 강렬한 욕구가 타올랐다. 새로운 삶을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면서 그는 인습적인 사회에 대하여 반항하고 강력한 증오심을 드러냈다. 그는 우선 완고한 자기 가정에, 자기 자신을 속박하는 크리스트교 신앙과 모든 사회적인 규약과 관습에, 자유의지를 억압하고 자신을 속박하는 모든 것에 반항했다. 랭보의 이러한 반항 정신은 그의 초기 작품에 잘 반영되어 있다. 랭보는 초기 시에서부터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젊은 시절의 불안과 반항을 나타낸 대부분의 초기 작품에서 그는 일찍이 낭만주의나 고답파의 선구자들을 본받아서 시의 원천을 제공받고 시를 썼다. (2) 조숙한 천재 시인 랭보는 중학교에 다닐 때부터 시에 소질을 나타냈다. 그는 중학 시절에 뛰어난 학생이었으며 라틴 시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그는 많은 책을 섭렵하였으며 진보적인 사고를 가진 수사학 선생 이장 바르(Georges Izanbard)는 그의 시를 인정하고 칭찬했다. 그는 빅토르 위고와 보들레르와 방빌(Theodor de Banville, 1832~1891) 등의 작품을 모방하기도 하고 독창적인 창의력을 발휘하기도 하면서 계속하여 시를 썼다. 랭보는 단번에 예술의 보든 비결은 발견했다 . 그는 위고나 고답파 시인들을 교묘하게 모방했다. 그렇지만 그는 벌써 무척 독창적인 영감에 따라 시를 썼다. 그는 16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곧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하게 된다. 그의 초기 작품 중에서 독특한 사상과 독창성이 드러난 시는 다음과 같이 들 수 있다. 그는 [감각]과 [나의 보헤미아]에서 방랑생활 하던 기간 중인 체험한 관능적인 행복을 묘사했다. 로마네스크 미술에서는 감상적인 그의 초기 감정을 익살스럽게 드러냈다. 교수형을 받은 사람들의 무도회에서 그는 견자적인 상상력의 위력을 발휘했다. 그는 또한 자기 고향 샤를르빌의 하층 부르주아 계급을 신랄한 야유로 비평하면서 초라한 생활에 대하여 타고난 혐오감을 드러냈다. 또한 음악에서는 무미건조한 부르주아 생활에 대한 혐오감을, 않아 있는 사람들에서는 관료주의에 대한 혐오감을 나타났다. (3)방랑시인 랭보는 자기 아버지로부터 방랑자의 기질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무미건조한 시골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1870년 보불전쟁(프랑스 역사상 중요한 전쟁, 나폴레옹 3세가 프러시아(지금의 독일) 에 라인강 좌안의 영토를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여 전쟁이 일어났다. 결국 프랑스가 패배하여 알사스, 로렌 지방을 프러시아에게 빼앗기고 50억 프랑의 배상금을 물었다.). 이 터지자 그는 대학 입학 자격시험을 포기하고 파리로 탈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는 무임승차로 체포되어 한동안 감옥 생활을 하다가 고등학교 수사학 선생 이장바르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1871년 1월에 그는 다시 고향인 샤를르빌로 돌아왔다. 그는 다시 나폴레옹의 제정이 멸망하자 쌍수를 들어 환영했으며, 당시 나폴레옹 3세의 정치적 억압에 분개했다. 그는 코뮌느의 폭동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자신도 코뮌느 반란에 가담했다. 그는 시 세라르의 분노에서 나폴레옹 3세 황제에 대해 맹렬히 공격했다. 랭보는 다시 파리로 떠나 문학 활동을 하고 싶어했으며 자기 시가 출판되기를 열망했다. 1872년 7월 6일 랭보는 홀로 시적 모험을 하기 위해 방랑 생활을 하려고 결심했다. 베를렌느도 그와 함께 떠나기를 원했다. 두 사람은 파리에서 시작하여 벨기에와 영국 각지를 떠돌아다니면서 과도한 음주와 무절제한 생활을 계속했다. 그러나 이 때의 체험은 두 시인에게 시적 영감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두 시인은 방랑 생활을 하다가, 1873년 7월 10일 베를렌느는 브뤼셀에서 친구 랭보에게 권총을 쏘아 부상을 입힌다. 그 후 베를렌느는 2년 간 감옥 생활을 하게 되었고 랭보는 방랑 생활을 계속했다. 이 때의 쓰디쓴 삶을 표현한 것이 지옥의 계절이다. 1874년 랭보는 다시 런던으로 가서 대영 박물관에서 공부했다. 런던에서 산문시 일뤼미나시옹을 썼다. 그는 견자로서의 시 이론을 실제로 작품화한 것이다 이 작품을 끝으로 그는 시를 더 이상 쓰지 않았다. 1875년 랭보는 스튜트가르트에서 출옥한 베를렌느를 다시 만났다. 그는 베를렌느에게 일뤼미나시옹의 원고를 보여 주면서 자기 친구에게 전달해 달라고 맡긴다. 이미 크리스트교에 귀의한 베를렌느가 랭보에게 크리스트교의 귀의를 권하다가 심한 언쟁 끝에 헤어졌다.1876년 이탈리아를 두루 여행한 후 네덜란드 군에 입대하여 자바까지 파병되나 탈영하여 그곳 상인들과 어울려 다될, 아라르, 키프로스, 중동과 유럽 등지를 다니면서 장사를 했다. 한때 상당한 돈을 벌기도 했지만 오른쪽 다리의 종양이 악화되어 1891년 마르세이유로 돌아와 치료하다가 얼마 후에 사망했다. (4)견자의 시인 랭보는 시의 목적이 새로운 세계에 도달하는 것이며 포착할 수 없는 세계를 포착하여 시야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체험을 넓혀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진정한 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견자가 되어 힘겨운 고행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견자가 되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했다. 그는 견자가 되어 미지의 세계를 찾아나섰던 것이다. 랭보는 견자가 되기 위해서 환각제의 사용, 무의식 세계의 탐구, 환각 상태 조작, 방탕 생활 등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미지의 세계를 체험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견자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감각의 착란을 통해서 이성적인 지각 능력이나 이해능력을 혼란 속에 빠뜨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시인이 지성과 고정관념 때문에 감각적인 능력을 상실하여 지성적인 장벽에 갇히고 만다고 개탄했다. 랭보의 새로운 시법에 비추어 생각하면 상징주의 이전에 시는 단지 운을 맞춘 산문에 불과하다. 그래서 시인들 중엔 왕자이자 진정으로 신과 같은 보들레르는 첫 번째 견자이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예술적인 환경에서 살았으며 그의 마음속으로 너무나 찬양하는 시형은 초라하다. 미지의 발견은 새로운 시형을 요구한다. 라고 드므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밝혔다. 랭보는 미지의 것과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 천국이냐, 아니면 지옥이냐의 갈림길에서 차라리 도덕적 지옥을 택했다. 불의 도적 프로메테우스에 비견되는 그의 모험은 기존의 문학을 초월하려는 일대 모험이다. 그는 의도적으로 초감각 상태와 환각 상태에 익숙해지면서 세계의 변모를 꿈꾸는 견자였다. ==== 랭보의 시에 대한 생각 ==== <시어의 연금술> 랭보는 새로운 세계, 초감각 상태의 세계, 초현실적인 세계를 표현하려면 새로운 언어를 발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모든 감각이 통하는 시어를 만들려 내려고 했다. 그는 자신이 말한 언어의 연금술로써 시적 이미지를 근본적으로 쇄신하려고 했다. 랭보가 추구하는 언어의 연금술로써 시적 이미지를 근본적으로 쇄신하려고 했다. 랭보가 추구하는 언어의 연금술이랑 성광처럼 빛나는 표현에 의하여 보든 감각의 요소들을 조화롭게 하나로 용해시키는 것이다. 랭보가 추구하는 새로운 언어는 우리의 감각을 자각하는 언어이다. 그러한 언어는 감각 교류와 사상을 동시에 전하는 언어이다. 이러한 시도는 이미 보들레르에 의하여 시도한 바 있다. 랭보가 끊임없이 추구하는 새로운 언어는 그의 시에서 새로운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 랭보의 시집 ==== <일뤼미나시옹> 이 시집은 랭보의 제 3단계에 속하는 산문 시집이다. 이 시집은 산문시 46편과 자유시 2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시들의 내용은 서로 관련성이 적고 이 시들의 배역에 대한 시인의 의도도 알 수 없으나 랭보의 대표적인 상징시이며 산문시의 걸작이다. 이 시집에는 난잡한 이미지와 사전들이 펼쳐져 있어 내용에 따라 여러 부분으로 구분하기도 어려우며, 시의 제복도 그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또한 자유시 두 편도 1885년 자유시 운동이 일어나기 10여 년 전 에 쓰여졌다는 점도 큰 의의가 있다. ==== 랭보의 영향 ==== 산문 시집 일뤼미나시옹 때문에 랭보는 상징주의 시인일 뿐만 아니라 후에 초현실주의 시인들의 선구자가 된 것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자동 기술법 즉 잠재의식을 나타내기 위해 이서의 통제에서 벗어난 글쓰는 방법을 제시한 셈이다. 일뤼미나시옹 때문에 랭보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의 문을 부순 것이다. 그는 잠재의식과 무의식의 세계에 깊숙이 들어가서 초현실주의 시인들의 자동기술법을 준비하고 동굴 내부의 벽 위에서 비춰 오는 광채를 기록한다. 이처럼 랭보는 상징 초현실주의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말라르메는 그의 예를 본받아 조화의 신으로 탈바꿈하려고 시도하고 시어의 힘을 빌어 초월적인 현실을 표현하려고 시도한다. 이처럼 그는 16세부터 21세까지 단기간 동안 활약하지만 그의 독창적인 시법은 10여 년 후에 전개된 상징주의 운동과 초현실주의 운동으로 이어진다. 그는 전통적인 시를 쇄신시킨 현대시의 선구자이다. ==== 랭보의 작품선 ==== 새벽 나는 여름 새벽을 가슴에 끌어 안았다. 궁전의 앞쪽은 아직 아무 기적 없이 고요했다. 물도 죽은 듯했다. 어둠의 진영을 숲 속의 길을 내놓지 않고 있다. 나는 생생하고도 따스한 공기를 깨우며 걸어갔다. 이슬 보석들이 쳐다보았다. 그리고 밤의 날개들은 소리 없이 일어났다. 나의 첫 사업은 이미 신선하고 푸름 빛으로 가득 찬 오솔길에서 나에게 자기 이름을 일러주는 한 송이의 꽃을 만난 일이었다. 나는 전나무 사이로 머리칼을 뚫어 헤치고 떨어지는 금발의 폭포에게 웃음 지었다. 나는 은빛 나뭇가지 끝에서 여신을 알아보았다. 그러자 나는 여신의 베일을 하나하나 벗겼다. 길에서는 팔을 흔들어 대며, 물 판에 서는 수탉에게 그녀를 밀고했다. 그녀는 튼 도시의 종각들과 둥근 지붕 사이로도 망쳤다. 나는 거지처럼 대리석 부둣가를 달려가며 그녀의 뒤를 쫓았다. 월계수 숲 근처의 언덕길 놓은 곳에서 나는 주워 모은 그녀의 베일로 그녀의 몸을 감쌌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방대한 육체를 약간 느꼈다. 새벽과 어린 아이는 숲 아래로 쓰러졌다. 깨어 보니 대낮이었다. 참고 서적 -프랑스 시 개론, 조규철 저,, 신아사 -프랑스 시.. 최완복 저,, 을서 문화사 -그 누가 커다란 사랑에 관해서 말하리,,, 랭보 시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