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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곳이 멀지 않다. - (2001.12. 23. sj)

              
  {{{ 
         푸른 밤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그러나 매양 퍼 올린 것은
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 
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
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나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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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안에서 택시잡기 -장정일 (01. 12. 24. 5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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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중당
열 다섯 살, 
하면 금세 떠오르는 삼중당 문고 
150원 했던 삼중당 문고 
수업시간에 선생님 몰래, 두터운 교과서 사이에 끼워 읽었던 삼중당 문고 
특히 수학시간마다 꺼내 읽은 아슬한 삼중당 문고 
위장병에 걸려 1년간 휴학할 때 암포젤 엠을 먹으며 읽은 삼중당 문고 
개미가 사과껍질에 들러붙듯 천천히 핥아먹은 삼중당 문고 
간행목록표에 붉은 연필로 읽은 것과 읽지 않은 것을 표시했던 
삼중당 문고 
경제개발 몇 개년 식으로 읽어 간 삼중당 문고 
급우들이 신기해 하는 것을 으쓱거리며 읽었던 삼중당 문고 
표지에 현대미술 작품을 많이 사용한 삼중당 문고 
깨알같이 각은 활자의 삼중당 문고 
검은 중학교 교복 호주머니에 꼭 들어맞던 삼중당 문고 
쉬는 시간에 10분마다 속독으로 읽어내려 간 삼중당 문고 
방학중에 쌓아 놓고 읽었던 삼중당 문고 
일주일에 세 번 여호와의 증인 집회에 다니며 읽은 삼중당 문고 
퇴학시키겠다던 엄포를 듣고 와서 펼친 삼중당 문고 
교련문제로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을 때 곁에 있던 삼중당 문고 
건달이 되어 밤늦게 술에 취해 들어와 쓰다듬던 삼중당 문고 
용돈을 가지고 대구에 갈 때마다 무더기로 사 온 삼중당 문고 
책장에 빼곡히 꽂힌 삼중당 문고 
싸움질을 하고 피에 묻은 칼을 씻고 나서 뛰는 가슴으로 읽은 삼중당 문고 
처음 파출소에 갔다왔을 때 모두 불태우겠다고 어머니가 마당에 
팽개친 삼중당 문고 
흙 묻은 채로 등산배낭에 처넣어 친구집에 숨겨둔 삼중당 문고 
소년원에 수감되어 다 읽지 못한 채 두고 온 때문에 안타까웠던 
삼중당 문고 
어머니께 차입해 달래서 읽은 삼중당 문고 
고참들의 눈치보며 읽은 삼중당 문고 
빠다맞은 엉덩이를 어루만지며 읽은 삼중당 문고 
소년원 문을 나서며 옆구리에 수북이 끼고 나온 삼중당 문고 
머리칼이 길어질 때까지 골방에 틀어박혀 읽은 삼중당 문고 
삼성전자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문흥서림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레코드점 차려놓고 사장이 되어 읽은 삼중당 문고 
고등학교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며 읽은 삼중당 문고 
고시공부 때려 치우고 읽은 삼중당 문고 
시공부를 하면서 읽은 삼중당 문고 
데뷔하고 읽은 삼중당 문고 
시영물물교환센터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박기영형과 2인 시집을 내고 읽은 삼중당 문고 
계대 불문과 용숙이와 연애하며 잊지 않은 삼중당 문고 
쫄랑쫄랑 그녀의 강의실로 쫓아다니며 읽은 삼중당 문고 
여관 가서 읽은 삼중당 문고 
아침에 여관에서 나와 짜장면집 식탁 위에 올라 앉던 삼중당 문고 
앞산 공원 무궁화 휴게실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파란만장한 삼중당 문고 
너무 오래되어 곰팡내를 풍기는 삼중당 문고 
어느덧 이 작은 책은 이스트를 넣은 빵같이 커다랗게 부풀어 알 수 
없는 것이 되었네 
집채만해진 삼중당 문고. 
공룡같이 기괴한 삼중당 문고 
우주같이 신비로운 삼중당 문고 
그러다 나 죽으면 
시커먼 뱃대기 속에 든 바람 모두 빠져나가고 
졸아드는 풍선같이 작아져 
삼중당 문고만한 관 속에 들어가 
붉은 흙 뒤집어쓰고 평안한 무덤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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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그루의 나무로 서고 싶다 (2001.12.24.s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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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겨울에
  1. 김남주
한파가 한 차례 밀어닥칠 것이라는 
이 겨울에 
나는 서고 싶다 한 그루의 나무로 
우람하여 듬직한 느티나무로는 아니고 
키가 커서 남보다 
한참은 올려다봐야 할 미루나무로도 아니고 
뼈까지 하얗게 드러난 키 작은 나무쯤으로 
그 나무 키는 작지만 
단단하게 자란 도토리나무 
밤나무골 사람들이 세워둔 파수병으로 서서 
다부지게 생긴 상수리나무 
감나무골 사람들이 내보낸 척후병으로 서서 
싸리나무 옻나무 나도밤나무와 함께 
마을 어귀 한구석이라도 지키고 싶다 
밤에는 하늘가에 
그믐달 같은 낫 하나 시퍼렇게 걸어놓고 
한파와 맞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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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의 혀 (2001.12.25.sj) - 김현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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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넷
최후의 통첩처럼 은사시나무숲에 천둥번개
꽂히니
천리만리까지도 비로
쏟아지는 너, 
나는 외로움의 우산을 
받쳐들었다
너·다섯
너를 내 가슴에 
들어앉히면
너는 나의 빛으로 와서
그 빛만큼 큰 그늘을 남긴다. 
그늘에 서 있는 사람
아벨이여
내가 빛과 동침하는 동안
그늘을 지고 가는 아벨이여
(나의 우울한 숙명)
단 하나 너마저
놔야 하느냐?
너·여섯
너에게로 가는
그리움의 전깃줄에
나는
감
전
되
었
다
                                高   靜   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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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감옥 (2001.12.26.sj) - 오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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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속의 아이야 너를 뱃속에 넣고
난장의 리어카에 붙어서서 엄마는
털옷을 고르고 있단다 털옷도 사랑만큼
다르단다 바깥 세상은 곧 겨울이란다
엄마는 털옷을 하나씩 골라
손으로 뺨으로 문질러보면서 그것 하나로
추운 세상 안으로 따뜻하게 
세상 하나 감추려 한단다 뱃속의 아이야  
아직도 엄마는 옷을 골라잡지 못하고 
얼굴에는 땀이 배어나오고 있단다 털옷으로
어찌 이 추운 세상을 더 막고
가릴 수 있겠느냐 있다고 엄마가
믿겠느냐 그러나 엄마는
털옷 안의 털옷 안의 집으로
오 그래 그 구멍 숭숭한 사랑의 감옥으로
너를 데리고 가려 한단다 그렇게 한동안
견뎌야 하는 곳에 엄마가 산단다
언젠가는 털옷조차 벗어야 한다는 사실을
뱃속의 아이야 너도 태어나서 알게 되고
이 세상의 부드러운 바람이나 햇볕 하나로 너도
울며 세상의 것을 사랑하게 되리라 되리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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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몸 (2002.01.03.sj) - 오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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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오후 나는 인조 수세비 석 장을 팔았습니다
'수출용'이라고 포장된 가위 하나
 양변기 청소용 솔 하나
 플라스틱 물통 둘을 팔았습니다
 수세미 석 장 팔아 300원 벌었습니다. 
 가위(꿈이 많았던 존재여) 하나에 230원
 양변기 청소용 솔과 플라스틱 
 물통 둘을 팔아 520원 벌었습니다
 수세미는 죽지 못하고 허물허물
 찢어질 목숨입니다 가위는 부러져야 하고
 양변기를 닦아야 하는 솔은 줄을 때까지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고
 플라스틱 물통 둘은 평생 몸이
 마르지 못할 목숨입니다 
 당신이 지나가야 하는 육교 위에 이렇게
 물건을 내장처럼 펼쳐놓고 있는 나도 
 내가 파는 물건처럼
 땅 위에서 마르지 못할 몸입니다
 당신은 무슨 몸의 말로 내 옆에 서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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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르 카이얌의 루바이야트”]

루바이야트

bd_c3.txt · Last modified: 2018/07/18 14:10 by 127.0.0.1